54세의 A 부인은 2남 2녀를 둔 가정 주부로 “속에서 불이 활활 타며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답답하며, 화가 나는 것을 참으려고 하면 목에 덩어리가 콱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 내원했다. 그이는 사는데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 없으며, 요즈음 들어서는 울고만 싶다고 하소연 했다. 한숨이 자꾸 나오고, 어디든 돌아다니고 싶은데 갈데는 없고… 내원 당시 그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병이 ‘화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며, 스스로 ‘속이 썩어서 생긴 병’이라고 표현했다. 이렇듯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듣게 되는 화병은 우리 나라의 문화와 관련된 정신의학적 증후군이라 볼 수 있다

중년 이후, 특히 부인에 많이 나타난다

화병은 서양 의학의 진단 분류 체계상으로는 우울증과 신체화 장애(身體化障碍), 범불안 장애(凡不安障碍), 공황 장애(恐慌障碍), 공포증 및 기분 부전증(氣分不全症) 등의 혼합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인구 중 4.2%에서 발견되는데, 특히 중년 이후 여성들에 많으며 사회 경제적 및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에서 그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 질환이다. 남편과 시부모 관계 등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 가난, 사회적 좌절 등에 의한 속상함, 억울함, 분함, 화남, 증오 등으로 대표되는 특징적 감정 반응과 함께 우울, 불안, 불면, 소화 장애, 두통, 신체적 통증 등 일반적인 신경증 증상이 동반된다. 또한 특징적으로 답답함, 열기, 입마름, 치밀어 오름, 가슴 뜀, 목 가슴의 덩어리 뭉침, 한숨, 뛰쳐 나가고 싶음과 하소연이 두드러지게 많아진다.

 

‘한’이 체념의 감정이라면 ‘화병’은 현재의 불안한 감정을 말한다

정신의학적 입장에서 볼 때 화병의 원인은 성장기 이후의 외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감정이 불완전하게 억제되고 장기간에 걸쳐 누적되면서 발생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恨)’이 오래 전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극복 또는 체념되거나 잊혀진 과거완료형의 휴화산과 같은 감정 반응이라면, ‘화병’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는 경험으로 감정이 극복되거나 잊혀지지 않은 상태 또는 불안정하게 억제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재 진행형의 감정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대개 화병과 관련된 생활 경험은 자식들의 속썩임, 사업 실패, 좌천, 승진 실패, 배우자의 외도, 사기당함, 이웃과의 다툼, 부당한 재판 등 비교적 최근의 경험들이며 현재도 진행 중인 사건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고유의 치료 방법이 개발 되어야 한다

이러한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장기간 억제되거나 체념되다 보면 허무, 후회, 외로움, 열등감을 느끼고 언젠가 다시 억울하고 분하고 증오하는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감정을 해소하여 치료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몇몇 정신과 의사들은 화병을 치료하는데 한을 해소하는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민간에도 “말로 푼다”는 말이 있듯이 감정을 가슴에 쌓아놓기 보다는 말로 이를 표현해야 한다. 한이 민족 고유의 정서라고 한다면, 그리고 화병이 그러한 감정에 기초한 정신의학적 장애라면 앞으로 이에 해당한 우리 고유의 치료 방법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